2020년 11월, 국내 유수의 철강회사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철강 제조에 사용되는 산소 공급 배관의 밸브를 열다가 순식간에 화재와 폭발이 일어났고, 그 사고로 작업 중이던 세 명의 근로자가 목숨을 잃었다. 산소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질이다. 하지만 매우 쉽게 폭발이 일어나는 위험물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날 산소 배관 밸브 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은 근로자들은 고압산소가 얼마나 위험한 물질인지, 또 고압산소 배관을 여는 밸브 작업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이뤄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작업을 했고, 결국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왜 위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현장 근로자들이 자신이 하는 작업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예정에 없었던 근무를 했던 그날
2020년 11월 24일, Y 업체의 주임 정OO 씨는 부하직원인 김OO 씨와 함께 예정에 없던 출근길에 나섰다. 원래 이날은 정OO 씨의 근무일이 아니었다. 오늘 작업은 원래 다른 직원 담당이었지만 마침 그 직원이 코로나19 확진으로 인해 자가격리를 하게된 상황이라 대신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정주임이 일하는 Y 업체는 K 기업의 산소공장에서 점검과 보수, 밸브 개폐 업무 등을 담당하는 협력업체다. K 기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철강 회사 중의 하나다. 철광석 원석에서 순수한 철을 만들어내고, 그 철을 제련하고 압연해서 우리가 아는 철판과 같은 철강 제품을 생산해 낸다.
그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고압산소다. 그래서 K 기업 안에는 철광석을 녹이는 고로나 제강공장 외에도 산소를 만들어내는 산소공장이 16개나 있다. 산소공장에서 생산된 산소는 배관을 통해서 고로나 제강공장 등으로 보내지는데, 오늘 정주임은 그 배관에 산소를 공급하거나 차단하는 밸브의 개폐 작업을 하러 가는 것이다. K 기업에 도착한 것이 오전 8시. 오늘 할 작업 내용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작업할 위치를 배정받았다. Y 업체가 이 일을 도급받아 해온 것이 6년이나 됐고 정OO 씨도 산소공장 배관 밸브 작업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 주어진 일은 전에 없이 복잡했다.
19개나 되는 밸브를 열고 닫아야 하다니...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던 복잡한 작업
오늘 일은 단순한 밸브 개폐 작업이 아니었다. 오늘은 16개의 산소공장 중 가장 먼저 지어진 1번부터 5번까지의 산소공장 철거에 앞서 노후 배관을 철거하는 날이었다. 1985년에 처음 설치됐으니, 35년이나 사용해 효율이 크게 떨어진 공장과 산소 배관을 철거하게 된 것이다. 오전에 회사 측이 설명했던 작업 내용에 따르면, 노후 배관을 철거하기 위해서 먼저 철거 예정 구간의 배관에 2개의 차단판을 설치해야 한다. 산소 배관은 각 플랜트와 공장 사이에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차단판을 설치하려면 연결된 산소 배관의 밸브 19개를 닫아야 하고, 배관이 철거되고 난 후에는 산소 공급을 위해 그 19개의 배관을 다시 여는 작업이 이뤄져야 했다.
이곳에서 근무한 이래 오늘처럼 많은 밸브를 열고 닫는 작업을 해본 적은 없었다. Y 업체는 1년에 대여섯 번 정도 밸브 개폐 작업을 했었고, 한 번 할 때에도 2, 3개의 밸브를 열고 닫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밸브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른데, 오늘 작업하는 밸브 중에는 한 번도 다뤄보지 않은 형태의 밸브도 있었다. 살짝 긴장은 됐지만 원래 K 기업 직원의 지시에 따라 밸브만 열고 닫으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라 오늘도 그렇게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정OO 씨였다.
먼저 차단판 설치를 위해 연결된 밸브를 잠그는 작업이 시작됐다. 정 OO 씨는 지시에 따라 밸브를 잠갔고, 곧이어 배관 내에 들어있던 산소를 배출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질소를 투입해서 배관 속 산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산소가 배출되면 산소 농도를 측정 했을 때 적어도 18% 이하의 수치가 나와야 하는데, 질소를 투입한 뒤에도 산소 농도는 67%로 높아도 한참 높았다. 차단한 밸브 중에 어딘가 새는 곳이 있다고 판단한 담당 부서는 상황 회의를 열어 의심스러운 위치의 차단 밸브를 선택해 확인을 하기로 했다. 새는 곳이 어디인지 소리도 들어보고, 밸브도 다시 조여보았지만, 산소가 누설되는 밸브를 찾을 수는 없었다. 산소를 배출시키기 위해 질소도 추가로 투입했지만 산소 농도는 계속해서 목표치를 웃돌았다.
산소 배관 밸브 개방과 함께 들려온 폭발음
오전 9시 43분경에 시작됐던 작업은 오후 3시 반이 되어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디서 산소가 새고 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러면 배관 철거 작업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계속 산소 공급을 차단시키고 있으면 고로나 제강공장의 제품생산에도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오늘 내로 배관 철거 작업이 마무리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담당 부서에선 추후 재작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차단해 두었던 밸브를 원상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밸브의 원상 복구 지시가 떨어졌고 정OO 씨와 함께 있던 본사 직원 이OO 씨가 조종실에 무전으로 보고를 했다.
“지금 차단했던 밸브를 원상 복구 조치하겠습니다.”
밸브를 다시 열라는 지시를 받은 정OO 씨는 지시대로 자신이 맡고 있던 13번 밸브를 열었다. 조종실에서는 그 밸브가 열리는 것을 확인했고 그것이 끝이었다. 정OO 씨가 열었던 13번 밸브는 배관과 함께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단지 닫혀 있던 산소 배관 밸브를 다시 열었을 뿐인데 폭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고 발생 밸브의 소실 부분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간 폭발 사고
바로 그 시각 산소공장 주변에서 작업 중이던 K 기업의 또 다른 협력업체 직원 OO 씨는 엄청난 폭발음에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과 30m 떨어져 있는 산소공장 쪽에서 시커먼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사고를 목격한 그는 곧바로 회사의 조종실에 무전으로 연락을 했다.
“사고가 난 것 같아요! 얼른 신고 좀 해 주세요!”
신고를 받은 하청업체 조종실 직원이 곧바로 방제센터에 연락했고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K 기업의 자체 소방대가 출동했다. 화재는 다행히 20분 만에 진압이 됐지만 불이 꺼진 작업 현장에서는 두 명이 심정지 상태로 발견이 됐다. 소방대원들이 2시간 동안이나 수색 작업을 벌인 끝에 나머지 한 명의 시신도 추가로 발견됐다. 13번 밸브의 개폐 작업을 담당했던 Y 업체의 정OO 씨와 부하직원, 그리고 함께 13번 밸브를 담당했던 K 기업 직원 이OO 씨 세 명이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다.

타 사업장 산소 배관에 설치된 균압 밸브
산소는 공기가 아니라 위험물질이다
사고 당일을 처음부터 되짚어봐도 특별히 사고가 날 만한 정황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한동안 닫아 두었던 밸브를 돌려서 다시 연 것밖에는 없다. 이 전에도 산소 배관 밸브의 개폐 작업은 여러 차례 진행해 왔고, 그것이 Y 업체의 업무였다. 그리고 배관의 밸브 작업은 본사 직원의 지시에 따라 열고 닫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산소 배관은 왜 폭발했던 것일까. 산소는 공기 중에 21% 정도 함유되어 있는 흔한 물질이다. 다만 이것을 산업적으로 활용하려면 질소, 아르곤 등이 섞여 있는 공기에서 산소만 추출해 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K 기업의 산소공장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작업이다. K 기업에서 산소를 생산하는 공정을 살펴보면, 먼저 압축기로 공기를 압축한 후, 영하 200℃로 냉각시켜 순수한 액체 산소를 추출한다. 이것을 기화 장치로 보내 기화를 시키면 산소 가스가 만들어지고, 이 산소는 배관을 통해 각 공장에 공급된다. 문제는 배관을 통해 공급되는 산소가 고압 상태로 보내진다는 데 있다. 산소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산소를 사용하는 플랜트의 용도에 맞게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공기 중에 질소 등과 혼합되어 있으면 안전하고 유용한 물질인 산소가 고압의 상황에서는 쉽게 화재나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물질이 된다.
그래서 고압산소 밸브의 개폐 작업을 할 때에는 차단 밸브를 개방하기 이전에 차단 밸브 앞뒤 배관의 압력이 같은지를 확인하게 되어있다. 만일 압력차가 크다면 산소가 밀려 들어오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로 인해 화재·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고압산소 배관에는 통상 차단 밸브 전·후단의 압력을 동일하게 해주는 균압 밸브가 추가로 달려 있다. 먼저 균압 밸브를 열어서 압력을 같게 만들어 준 뒤, 차단 밸브를 열어서 산소를 통과시키도록 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가 났던 배관에는 균압 밸브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균압 밸브 없이 차단 밸브를 열게 되면 산소의 압력이 높기 때문에 조금만 열어도 빠른 속도로 산소가 밀려 들어올 위험이 커진다. 결국 사고는 균압 밸브가 없는 상황에서 밸브를 다시 열면서, 고압의 산소가 빠른 속도로 비어있던 배관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내부의 금속 입자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화재·폭발로 이어졌던 것이다.
일반탄소강 재질의 산소 배관은 화재에 취약한데...
사고가 난 산소 배관의 재질은 일반탄소강이었다. 일반탄소강 재질의 배관에서는 산소가 흐르는 속도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불꽃이 튈 가능성이 훨씬 높다. 같은 속도로 산소가 흐를 경우 스테인리스강은 화재가 일어나지 않아도, 일반탄소강 재질의 배관에서는 화재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고압산소 배관의 경우, 스테인리스강 재질을 사용하는 것이 권고되기도 하고, 이미 스테인리스강 재질의 배관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 K 기업의 산소 배관 중에도 스테인리스강 재질의 배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가 난 배관은 일반탄소강 재질의 배관이었고, 사고가 났을 당시 이 일반탄소강 재질의 산소 배관을 통과했던 산소의 유속은 기준치를 훨씬 초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배관의 재질도 화재의 또 다른 원인이었던 것이다.
배관 안에는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철 부스러기가 남아있었다
일반탄소강 재질의 배관이라고 해서 모두 화재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화재가 발생하려면 필수적으로 가연성 물질과 불꽃을 만들어주는 점화원이 있어야 한다. 이번 사고에서 가연성 물질과 점화원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유력한 것은 일반탄소강 재질의 배관 내에 남아있었던 철부스러기 같은 금속 입자였다. 일반탄소강의 경우 배관이 오래되어 부식되거나 마모되면 그 부스러기들은 배관 안에 남아서 산소가 고압으로 밀려 들어올 때 점화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남아있던 금속 입자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불꽃이 발생하고, 화재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탄소강 재질의 배관은 산소의 유속이 높아지지 않도록 밸브 개폐 작업을 천천히 해야 한다. 실제로 사고가 발생한 배관의 내부에는 철부스러기 같은 것이 상당수 남아있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고 이후 남아있는 배관의 두께를 측정한 결과, 가장 많이 감소한 것이 52% 정도나 되어, 사고가 난 배관에는 적지 않은 양의 금속 입자와 유기물이 남아 있었고 그 상태에서 고속으로 산소가 흐르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화재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약해 보면, 이번 사고는 상대적으로 화재의 가능성이 높은 일반탄소강 재질의 산소 배관이었고, 그 속에 철 부식물 등의 금속 입자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균압 밸브 없이 차단 밸브가 개방되면서 고압의 산소가 밀려 들어와 화재와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균압 밸브만 설치돼 있었더라도
사고의 일차적인 원인은 차단해 두었던 밸브를 개방하면서 고압산소가 빠른 속도로 배관에 흘러들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만일 산소의 속도와 압력을 낮춰줄 균압 밸브가 설치돼 있었고, 균압 밸브로 압력이 조절된 상태에서 밸브를 열었다면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균압 밸브는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K 기업 16개의 산소공장에는 모두 48개의 균압 밸브가 설치돼 있다. 하지만 사고가 난 13번 밸브에 균압 밸브가 없었던 것처럼 K 기업의 모든 차단 밸브에 균압 밸브가 설치돼 있는 것은 아니다. 산소공장을 운영하는 다른 기업이 모든 수동 차단 밸브의 전·후단에 균압 밸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국제적 기준을 보면 고압산소 배관에 균압 밸브를 설치해 운영하는 것은 기본이다. 국제표준에 따르면, “산소 밸브를 개방할 경우에는 균압 밸브를 활용하여 산소 밸브 전·후의 동압 상태를 확인한 후 밸브를 서서히 개방하라”고 기술돼 있는데, 균압 밸브 설치를 아예 전제로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국내 철강회사 중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K 기업에서 사고 방지를 위해 필수적인 균압 밸브가 왜 부분적으로만 설치되어 있을까? 사고 후 조사를 해 보니 K 기업 산소공장에는 균압 밸브 설치 기준이 명확하게 마련돼 있지 않았다. 즉 균압 밸브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해당 산소공장 측은 균압 밸브의 역할을 단지 차단 밸브를 조작할 때 전·후단의 압력을 감소시켜 밸브 조작을 쉽게 만들어주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균압 밸브가 산소 배관 밸브 조작 시의 화재 및 폭발 위험성을 감소시켜 줄 필수적인 안전 장치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균압 밸브가 사고 배관에 설치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밸브 개방의 원칙과 방법이라도 명확히 알려줬어야
균압 밸브가 설치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 차단 밸브 조작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밸브 조작과 관련해 K 기업의 작업표준에는 매우 간단히 기술돼 있다. “산소 출구 밸브는 서서히 작동, 급격한 밸브 조작은 폭발 위험 야기” ‘서서히’라는 건 매우 주관적인 기준이다. 어느 정도로 돌려야 서서히라는 기준을 만족할 수 있을까. 작업자의 판단과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속도를 적용할 수 있다. 이렇게 주관적인 해석이 가능한 규정은 규정이라 하기 어렵다. 또한 해당 기업의 작업절차서에는 “산소 통입을 위해 차단 밸브를 완전히 개방하기 이전, 차단 밸브 전·후단의 압력이 같음을 확인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즉, 비어있던 산소 배관 안에 다시 고압의 산소를 흐르게 할 때에는 산소가 들어오는 부위와 나가는 부위의 압력이 같은지 확인한 후 천천히 밸 브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압력이 같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압력계가 달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고가 난 배관에는 압력을 측정할 수 있는 장치도 없었고, 밸브를 여는 방법도 어느 정도의 속도로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았다. 문서상으로 작업의 원칙이 없지는 않았지만, 정확한 실행의 방법이 명시되지 않은 채 위험한 산소 배관의 밸브 조작 작업은 현장 근로자들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시피 했던 것이다. 결국 원칙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차단 밸브 주변 방호벽
방호벽만 있었어도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균압 밸브가 없어도 방호벽만 설치돼 있었더라면 세 사람이 사망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이 기업의 다른 산소 배관에는 차단 밸브 주변으로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 적지 않게 있다. 방호벽이 설치된 곳은 방호벽 밖에서 차단 밸브를 조작할 수 있게 되어 있어, 화재나 폭발같은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업의 모든 산소 배관 밸브 주변에 방호벽이 설치돼 있는 것은 아니었고,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13번 밸브 주변에도 방호벽은 없었다. 방호벽은 공장이 처음 지어진 1985년부터 2008년까지 공장이 새로 건설 될 때 맞춰 설치돼 왔다. 그래서 1번 공장부터 14번 공장까지는 방호벽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2008년 이후에는 15번, 16번 공장이 새로 건설됐어도 방호벽 설치는 없었다. 2008년 이후 방호벽이 설치된 것은 단 한 차례, 2014년이었다. 2014년은 이번 사고와 똑같이 산소 배관 밸브를 조작하다 폭발 사고가 일어나 3명이 숨졌던 해다. 그때에도 부실한 안전 조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면서 방호벽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방호벽이 설치는 됐지만 한 곳에만 추가 설치된 것을 보면 안전을 위해 방호벽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설치를 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K 기업 산소공장에는 이번 사고가 났을 때까지도 별도의 방호벽 설치 기준이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안전 장치로서 방호벽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없었던 것이다.

방호벽 바깥쪽에 설치된 조작 핸들
사고로부터 배워야 할 것들
이번 사고를 통해 알게 된 개선점은 다음과 같다.
• 산소공장의 차단 밸브 전·후단엔 균압 밸브가 설치돼야 한다.
• 밸브 개폐 작업 시엔 어떻게 균압 조치를 할 것인지 구체적이고 정확한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
• 일반탄소강 재질의 산소 배관은 화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관리를 철저하게 하거나 스테인리스 재질로 교체해 줘야 한다.
• 차단 밸브 주변에는 콘크리트 방호벽을 설치하고 방호벽 밖에서 밸브를 조작 하게 함으로써 화재 및 폭발 사고가 났을 경우 근로자를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산소 배관 밸브 작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산소 배관 밸브 작업은 단순히 차단 밸브를 열었다 닫는 것만으로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날 수 있고, 그 강도는 쇠로 만들어진 배관을 순식간에 폭파시키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구성원 모두가 알아야 한다. 위험성을 정확히 알아야만 안전한 작업을 위한 절차와 작업 시스템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균압 밸브와 방호벽을 어떤 기준으 로 어떻게 설치할 것인지 기준이 마련되고 밸브 작업에 관련된 구체적인 작 업표준과 매뉴얼도 마련될 수 있다. 우리가 사고에서 배워야 할 것은 앞으로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실효성 있는 대책이다
2014년의 사고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사고 발생 6년 전인 2014년에도 K 기업 산소공장에서는 이번 사고와 똑같은 사고가 발생했었다. 새로 설치된 산소 배관을 시운전하는 과정에서, 산소 배관의 밸브를 열다가 화재가 발생해 작업 중이던 근로자 3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였다. 단지 밸브를 열었을 뿐인데, 배관 내부에 남아있던 기름기가 고압의 산소에 의해 발화되어 화재와 폭발이 일어났고, 현장 근로자 3명이 사망했다. 이번 사고와 원인부터 결과까지 쌍둥이처럼 닮은 사고다. 사고 이후 바뀐 것은 없지 않았다. 방호벽 하나를 추가로 설치했고, 원래 K 기업에서 해오던 밸브 개폐 업무를 외주화했다. 그렇게 협력업체로 선정된 곳이 바로 Y 업체였다. 그리고 6년 만에 똑같은 사고가 발생해 협력업체 직원 두 명을 포함해 세 명의 근로자가 희생됐다. 방호벽 하나를 추가로 설치한 것을 제외하면 사고를 통해서 바뀐 것은 위험한 산소 배관 밸브 작업을 외주업체에 맡긴 것 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 결과, 6년 전의 사고에서 문제로 드러난 것은 바뀌지 않았다. 당시와 똑같이 2020년의 작업자들도 산소 배관 밸브 작업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균압 조치 등 위험을 관리할 방법도 알지 못한 채 작업을 했다. 2014년이나 2020년이나 산소 배관 밸브 작업의 구체적인 매뉴얼은 없었다.
세 명의 목숨이 희생됐지만,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달라진 것은 없었던 것 이다.
배워야 했던 것은 산소 배관 밸브 작업의 위험성이다
산소 배관 밸브를 열고 닫는 작업은 밸브를 돌리기만 하면 되는 극히 단순한 작업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고압산소 취급 공정에서 가장 위험한 작업 중의 하나다. 밸브를 급속히 개폐할 경우엔 배관 내부에 남아있는 금속 입자에 충돌을 일으키거나, 유분과의 마찰로 화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5년에 설립된 K 기업은 지금까지 16개나 되는 산소공장을 보유하면서 30년이 넘게 산소를 생산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산소 작업의 위험 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안전 운영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빠트린 채 운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산소공장의 고위 관리자조차 이런 위험성을 모르는 상태였다. 산소 배관 균압 밸브의 역할을 밸브의 조작이 쉽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정도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운영 부서나 협력업체의 작업자들이 그 위험성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취급 대상 물질과 그 물질의 취급 공정에 대한 위험성을 명확히 알지 못해서 빚어진 결과는 두 가지다. 명확한 작업 지침이 마련되지 않는다는 것과 작업자들이 본인이 하는 작업의 위험 관리 방법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K 기업 산소공장에는 산소 배관 관리 지침이 있다. 그리고 그 지침에 따라 어떻게 작업할 것인지 구체적인 작업계획서가 작성되게 된다. 하지만 이 산소 배관 관리 지침에는 균압 밸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밸브 조작 작업은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명시돼 있지 않았다.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 조치 역시 당연히 빠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업계획서 상에도 이같은 내용은 반영되지 않았고, 작업자들은 밸브 조작을 할 때 왜 압력을 맞춘 뒤 서서히 밸브를 열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고는 산소 배관 밸브 작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몰랐던 데서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산소 전문가 없는 산소공장 산소공장의 운전 매뉴얼은 영문판밖에 없었다
놀라운 것은 사고가 난 산소공장 자체에 한글로 된 운전 매뉴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산소공장과 같은 장치산업에서 안전 운전을 하려면 설계 자료나 운전 매뉴얼은 필수다. 공장 시스템이 어떻게 가동되는지 설계의 기준과 의도부터 시작해 설계에 반영된 산소공장의 위험성, 안전설계의 기준 등을 모두 이 운전 매뉴얼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산소공장은, 공장을 설계했던 프랑스와 일본의 회사로부터 완전한 운전 매뉴얼을 받지 못해 산소공장의 운전 매뉴얼을 일부만 가지고 있었고, 그마저도 영문으로 작성된 것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그 부분적인 영문 매뉴얼에는 반드시 반영되었어야 할 산소 배관 밸브 조작 시의 위험성 등 안전 관련 사항은 빠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공장은 30년 넘게 안전 운전 자료조차 없이 가동돼 왔던 셈이다. 그동안 공장의 운전과 유지 보수는 매뉴얼이 아니라 선임자들의 경험을 통해서만 전수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균압 밸브나 방호벽의 필요성과 역할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산소 배관 밸브의 조작 방법을 그저 ‘급격히 조작하 지 말 것’ 등으로 정의해, 작업자들에게 명확한 지침을 주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 산소공장에는 산소공장 전문가가 없었던 셈이다. 시간이 흘러 선임자들마저 퇴직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경험에 의한 전수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왜곡되거나 사라지기 쉽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더 큰 사고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구조인 것이다.
사고 대책 비용은 안전 역량 강화에 투자되어야 한다
설계 자료와 운전 매뉴얼조차 없는 채 수십 년을 운행해 왔고, 사고 발생 이후에 근본적인 안전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음에도 피해 규모가 이 정도에 그친 것은 단지 요행일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 같은 요행이 지속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사고가 발생한 뒤 K 기업에선 앞으로 3년간 안전을 위해 1조 원 규모의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K 기업은 지난 2018년에도 산소공장에서 협력업체 직원 4명이 질소가스에 중독돼 사망하는 등 여러 건의 안전사고가 발생하자, 사고 예방 대책으로 1조 1천 50억 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었다. 그리고 3 년이 지난 2020년에 그 예산은 1조 원가량이 집행된 상태였다. 안전 전문가를 외부에서 충원했고, 안전전략사무국도 신설했으며 사고가 발생할 경우 즉각 연락할 수 있는 스마트워치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사고는 발생했고 또다시 근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안전을 위한 비용은 집행되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집행될 1조 원은 정말로 필요한 곳에 사용돼 더 이상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사를 통해 드러났듯이 시급한 것은 회사 내부의 안전 역량을 강화하는 일이다.
안전 운영에 기본이 될 설계 자료와 운전 매뉴얼은 지금이라도 온전히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한글로 쉽고 명확하게 작성해 누구나 읽고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산소의 위험성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공장 운영의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들이 산소공장의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위험성 평가나 작업 표준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장의 근로자들에게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침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전 구성원이 각자의 영역에서 안전 전문가가 되고, 그 각각의 영역이 긴밀하게 협력하게 된다면, 그처럼 막대한 사고 예방 비용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단순한 계산만으로도 지금까지 사용된 2조 원의 안전 비용은 기업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투자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걱정 없는 안전한 현장이 구현되면서 일어나게 될 부가적인 가치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안전 비용을 어디에 투자해야 할 것인가. 그것을 파악하는 것부터 변화는 시작돼야 한다.
출처: 과거의 사고를 반면교사로 화학사고 사례집 (KO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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